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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죽음

by oldpickers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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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센트 빌럼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의 본명이다. 
 고흐는 1953년 네덜란드 목사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사실 고흐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의 이름도 빈센트 빌럼 반 고흐였다. 형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죽은 형을 대신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화가가 되기 전의 삶

 
고흐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고흐가 태어나고 2년 후에 여동생 아나 코르넬리아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다시 2년 후에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가 된 남동생 테오가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큰 두각을 보이진 않았으나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는 직접 야생화를 그리거나 꽃다발을 수채화로 그리는 등 미술을 취미생활로 즐겼다고 한다.
 15살 무렵, 고흐는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학자들은 이때 고흐가 정신장애나 발작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한다. 고흐의 집안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는데 이게 고흐에게도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발작이 지나가자 집에서의 생활이 따분해졌고, 아버지도 아들을 학교에 돌려보내자니 돈이 많이 드니 일이라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맞아떨어져서 16세 때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헤이그 미술상인 구필 화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안정적으로 구필 화랑에서 일하면서 전도 유망한 화상의 길을 걷고 있던 고흐는 구필 화랑의 런던지점을 내기 위해 런던으로 파견되었으나, 고도로 산업이 발전한 런던에서 본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충격과 하숙집 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예를 사랑했지만 실연을 당하게 되고 일평생을 괴롭히던 정신적인 증세, 그리고 훌륭한 그림을 보호하고 작가를 후원하는 이상적인 방식이 아닌 크게 가치 없는 그림이라도 돈을 위해 감언이설로 팔아야 하는 화상의 생활방식에 염증을 느껴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구필 화랑을 그만둔 후 종교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종교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영국에서 무급 교사로서 일하다 그만두고 퇴짜만 맞다가 영국 감리회 소속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를 만나 그의 보조목사 겸 존스 목사의 학교에서 조수 교사로 채용되어 일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조울증이 찾아왔다. 결국 이 때문에 잘해나가던 보조 목사직도 그만두고 다시 네덜란드 가족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아들이 광신적인 목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는 다시금 형 센트에게 도움을 구해 서점에 일자리를 얻어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쫓겨난다. 그로 인해 빈센트와 큰아버지 센트와의 인연은 완전히 끝이 난다.
 다시 돌아온 고흐는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아버지는 고흐의 이모부인 요하너스 스트리커르 목사에게 도움을 구하는데, 조카 고흐의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를 붙여서 목사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목사의 딸에게 빈센트가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정신적 혼란이 일어났고 시험 준비도 끝장나고 말았다.
 결국 다시 아버지가 나서 벨기에의 공업지대나 탄광지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단체에 전도사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전도사 양성학교에 입학시켰지만 그마저도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선교단체에서는 결국 고흐를 탄광에서 무급 조수로 쓰기로 결정했다. 탄광에서의 극단적인 고행으로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던 와중에 선교단체에서 보리나주로 시찰관을 파견했고 고흐의 상태를 본 시찰관은 선교단체에 고흐는 전도사로 부적절하다고 보고를 올렸다. 선교단체에서 해고당한 고흐는 중재를 부탁하려고 브뤼셀까지 걸어서 아는 목사를 찾아갔고 그 목사는 고흐가 성직보다는 미술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본인이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목적에서 성직의 길을 계속 가고 싶다면 보리나주로 돌아가서 무급으로 조수 일을 다시 시작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포기하고 다른 길인 미술의 길로 갈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보리나주로 돌아간 고흐는 이제 성직보다 미술에 더 기울었다. 보리나주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술적 훈련이 부족한 탓에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열의가 강해져 고흐는 만 27세이던 1880년, 보리나주를 떠나 브뤼셀로 가게 된다.
 

테오 반 고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다

 
브뤼셀로 온 고흐는 화가가 되기 위해 외사촌이자 화가였던 안톤 모베에게 몇 년간 그림을 지도받았다. 고흐의 괴상한 성격 탓에 자주 마찰을 빚었지만 모베는 어려운 고흐를 돕기도 하고 그림을 가르쳐주려고 노력도 했다. 그러나 고흐가 매춘부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고흐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완전히 미쳐버렸다며 고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지원해 주던 동생 테오마저도 매춘부와의 동거를 반대하면서 그녀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결국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틀어져 매춘부와도 결별하고 만다. 
 그런 가운데 동생 테오가 구필 화랑을 때려치우고 미국으로 건너가 독자적으로 화랑을 세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고흐는 어찌할까를 고민하다 결국 뇌넨으로 옮겨간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12월에 뉘넨으로 가게 된다. 형 때문에 동생 테오는 구필 화랑에 남아서 계속 고흐를 후원하게 되었다. 심지어 고흐가 소묘와 유화를 파리로 보내면 테오가 그것을 구입하는 식으로 일종의 봉급을 주라는 과도한 요구에도 테오는 승낙했을 정도다. 
 이런 가운데 마르호트 베흐만이라는 노처녀가 고흐에게 푹 빠지게 된다. 고흐는 마르호트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것 때문에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닸다. 양가에서도 반대하는 바람에 마르호트는 정신이 폭발해 독을 마시고 신경 발작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작은 마을에서 이는 심각한 스캔들이었고 고흐는 잠시 뇌넨을 떠나 아인트호벤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고흐는 대작을 구상하게 된다. 호르트라는 농부의 집을 지나다 호르트 가족들이 석유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기로 결심한다.

감자먹는 사람들

이 와중에 1885년 3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창작열이 쇠퇴했지만 만회하기 위해 색채론을 탐독하여 감자 먹는 사람들을 다시 완성한다. 그토록 원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의 성취였다. 나름대로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지만 테오에게 보낸 그림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감자 먹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준 호르트 가족 중에 결혼하지 않은 딸이 임신하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뉘넨 사람들은 고흐가 괴상한 차림에 해괴한 기행을 하고 다녔기에 이 일을 고흐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되자 뉘넨의 신부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고흐의 그림 모델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고흐는 더 이상 뉘넨에서 인물화를 그리기가 어려워졌다. 

고갱과의 만남 그리고 귀를 잘라버린 고흐

 
 파리로 간 고흐는 곧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프랑스의 시골 아를로 이주해 그림을 그린다.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고흐는 아는 화가들에게 모두 편지를 보내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에 응했던 화가는 유일하게 폴 고갱 정도였다. 사실 고갱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었는데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생활비를 대주는 식이었기 때문에 늘 돈문제로 어려웠던 고갱에게도 고흐와의 공동생활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고갱이 그린 고흐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차이,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가 있었다.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서 창의적으로 그리는 것을 선호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폭발한 그림은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다. 고흐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 흐리멍덩한 모습으로 보였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조롱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 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고갱이 온 지 두 달 만에 고흐는 정신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 듯해 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서는 나가버리더니 귀를 잘라버린 것으로 보이며 잘라낸 걸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왼쪽 귀를 완전히 자른 건 아니고 귓불만 잘랐다. 고흐가 귀를 완전히 잘라버린 걸로 오해를 받은 것은 그의 자화상에서 왼쪽 귀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지만 여러 기록으로 보면 귓불만 자른 게 분명하다. 테오가 후에 고흐를 방문했을 때 귓불만 잘려서 얼핏 보면 귀를 잘랐던 일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상처가 안 보인다고 했을 정도다.
 왜 하필 귀를 잘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압생트를 많이 마셔서 스스로 망가진 것이다, 자신의 신체를 자르라는 명령적인 환청 때문이다, 어쩌면 고갱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차원에서 고갱을 찌르려다 생각을 돌이켜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그것으로 고갱의 압박에서 벗어나 승리했다는 상징이 아니었을까라는 추측도 있었다.
 테오의 갑작스러운 결혼소식에 충격을 받아 귀를 잘랐다는 설도 있다. 동생인 테오를 너무 아껴 테오가 결혼할 때 가족들이 그 사실을 고흐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고흐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는 세 번이나 졸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로 테오의 아내와 그 아이도 많이 사랑했으며 고흐는 대체적으로 테오의 가족과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고흐는 물감이나 석유를 먹으려 드는 발작 증세를 보여 아를 시민들이 고흐를 강제로 입원시키라고 민원을 넣을 정도였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아를 사람들이 강제 입원시키라고 청원한 것에 고흐는 불만이 터졌고 테오에게 다른 정신병원에 가고 싶다고 부탁했다. 결국 테오는 형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릴 만한 정신병원을 알아보았고 생레미의 생폴 요양병원을 추천받아 아를을 떠나 생레미로 가게 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
아를교의 밤

생레미 시절에 고흐의 후기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여러 개 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 이라던지 '사이프러스 나무'라던지. 그리고 살아생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은 듯한 느낌이 강한 고흐의 이미지와 다르게 그는 이 시기에 슬슬 몇몇 전시회에 그의 그림이 초청받고 호평받으며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그림이 팔린 것도 이때. 
 하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우울증이 온 건지 이때까지의 그의 그림에 스스로 혹평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림이 생각대로 안 그려지는 것에 대한 비관도 심해졌다고 한다. 또한 화가가 된 지 10년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도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여 테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고흐의 죽음이 실린 신문
고흐의 비극적 죽음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결국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프랑스제 권총 리볼버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 즉사하지 않고 총알이 가슴을 관통해 척추에 걸려 손상을 입고 피투성이로 무려 거리가 1.6km에 달하는 한 여관에 와서 쓰려졌는데, 여관사람들이 두 명의 의사를 데려와 총알을 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테오가 고흐를 찾아왔으며, 고흐는 자신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의식도 있었고 스스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상태가 좋았지만 곧 고흐는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고통스러워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인 1890년 7월 29일에 숨을 거두었다. 
 너무 비참하게 맞이한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 반 고흐마저 정신병이 생겨서 형이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년 2월 25일 서른넷의 나이로 형의 길을 따라간다. 
 
 고흐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기간은 겨우 10년 정도이다. 초창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로부터 계산하면 고흐가 대작을 그렸던 기간은 약 5년이다. 고흐는 사후에 생각보다 빨리 인정받았다. 사후 15년쯤 후에는 거장으로 여겨졌다. 고흐가 장수했더라면 말년에 명성을 누리며 살았을 수도 있다. 
  참고로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약 708억 원)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고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약 1003억 2천만 원)에 팔렸다. 

생애 화가로서 한 번도 대접받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 비극이 또 여러 훌륭한 작품을 남겨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서울 띠아트에서 <반고흐 인 서울>이 전시 중이니 한 번 들러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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